아름다운 만남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사람

서울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김민선 교수

미숙아 혹은 고위험 신생아들의 생존율이 증가하면서 중증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김민선 교수는 생과 사를 오가는 불확실한 여정을 보내는 환아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긴 동행을 함께하고 있다. 김민선 교수는 전임의 시절 중증질환 환아들에게 의료인으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하면서, 그 길로 소아 호스피스를 공부해 소아 완화의료팀을 꾸렸다. ‘의사’가 아니라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되고 싶어 의대에 진학한 만큼 지금도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다.

편집실 사진 송인호

특별한 놀이터, 도토리하우스에서 보낸 일 년

지난해 11월 국내 최초의 중증소아 단기입원 의료시설인 ‘서울대학교병원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가 문을 열었다. 인공호흡기나 산소 사용 등으로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중증 환아와 가족들에게 종합적인 의료·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곳을, 작은 씨앗이 도토리를 열매로 맺는 참나무처럼 자랄 때까지 안전하고 편안한 보살핌을 제공하겠다는 마음을 담아 ‘도토리하우스’라고 이름 지었다. 개소 일 년을 맞은 도토리하우스의 ‘촌장’ 김민선 교수는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한 해였다며 웃어 보인다.

“사실 이렇게 어려울지 몰랐습니다.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다고 과신했다고 할까요? 제가 완화의료를 시작하고, 재택의료를 3~4년 정도 해온 시점에서 도토리하우스를 열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을 누구보다 잘 돌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우리가 부모님 없이 아이를 돌본 적이 없었던 거죠. 간호팀을 비롯해 유능한 분들을 모아 팀을 꾸렸기 때문에 잘하고 싶었고 또 잘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는데, 지금은 생각을 많이 바꿨어요. 우리가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만큼은 못 한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겸손한 마음이 생긴 것 같습니다.” 김민선 교수는 훌륭한 의료진이 의료적 처치를 아무리 잘하더라도 절대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일 년이었다고 말한다.

센터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터라 도토리하우스 개소 후 일 년은 김민선 교수에게 고민과 반성의 시간이었겠지만, 이곳을 찾은 환아의 가족들에게는 감사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아이가 아픈 뒤로 엄두를 내지 못했던 외식을 할 수 있었고, 여행으로 행복한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아이 건강을 위해 제주도로 이사했다는 한 가족은 정작 바깥 구경을 할 여유가 없었는데, 도토리하우스의 돌봄 서비스 덕분에 제대로 된 제주도 여행을 해볼 수 있었음에 감사해했다.

“단 며칠이라도 진심으로 아이를 돌봐주시는 선생님들에게 고개숙여 감사드린다”는 마음이 담긴 편지에서 위안을 얻고 다시 힘을 내는 것이 김민선 교수를 비롯한 도토리하우스 구성원들의 보람이다.

치료와는 좀 떨어져 있는 것들을 챙기는 의사

김민선 교수는 서울대학교병원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장, 중증소아단기의료돌봄센터장, 소아청소년과 임상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전에는 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부센터장을 역임했다. 도토리하우스 류민주 수간호사는 김민선 교수에 대해 ‘늘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분’이라고 표현했다. 중증질환 환아와 가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더 큰 시점에서 바라보며 완화의료, 재택사업, 특수학교사업 등 다양한 정책을 제안해왔고, 실제로 정책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봤기에 이러한 표현을 했을 것이다. 이는 김민선 교수가 스스로를 ‘치료와는 좀 떨어져 있는 것들을 챙기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레지던트를 마치고 종양학(oncology)을 공부했는데 일 년 정도 해보니까 못 하겠더라고요. 당시 조혈모세포 이식을 많이 했는데 아이들이 합병증으로 많이 사망했어요. 제가 처음 진단할 때부터 본 아이들을 몇 개월 사이에 보내야하는 상황들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환자들이 사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현실이 너무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더이상 못 하겠다는 마음이 더 커서 병원을 나갈 결심까지 했는데, 주변 선생님들이 ‘이번에 공공진료센터에서 소아과 의사 뽑는다는데, 너 원래 사람 돕는거 좋아하니까 거기 가서 일 해보는게 어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길로 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에서 진료교수로 활동하던 김민선 교수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소아 완화의료였다. 우연한 기회에 소아청소년 완화의료에 대한 강의를 듣고, 그동안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이 바로 이것임을 깨달으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당시 김민선 교수는 공공진료센터 진료교수로서 맡은 업무를 수행하면서 틈틈이 따로 시간을 내어 완화의료 일을 병행했고, 하면 할수록 이 일에 더 마음이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2018년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으로 정식 발령이 나며 국내 최초로 소아 완화의료팀을 꾸리게 된 김 교수는, 그때부터 정부가 지원하는 소아청소년 완화의료 프로그램 ‘꿈틀꽃씨’를 본격적으로 운영했다. 뜻에 공감하는 분이 많아 원만하게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이라는 김민선 교수.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를 통해 환아와 가족들의 삶이 조금 더 풍요롭고 조금은 덜 힘들도록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다.

환아와 가족 모두를 위해 필요한 쉼의 시간

어린 몸과 마음으로 무거운 병과 싸워야 하는 환아와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 이들의 짐을 덜어주는 소아청소년 완화의료사업을 비롯해 중증소아 단기입원서비스, 소아 재택의료에 이르기까지 김민선 교수는 많은 사업을 준비했고 또 제도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김 교수는 그간 본인이 거둔 가시적인 성과들에 대해 우연의 결과이고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중증질환 소아청소년과 그 가족들을 케어하기 위한 장치가 없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중증도가 높은 소아청소년 환자들은 365일 24시간 의료적인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로 인해 가족들은 쉴 수가 없고,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쉼의 시간’이 가족들과 환아 모두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만큼, 도토리하우스와 같은 어린이통합케어센터가 전국적으로 추가·확대되어야 합니다.”

저출산이 심화하면서 문을 닫는 소아과가 늘어나고, 또 전공의들이 가장 기피하는 소아청소년과의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대한 김민선 교수의 생각이 궁금했다.

“인턴을 마치고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할지 말지 고민하면서 유럽의 수도원과 기독교공동체 마을에 체류한 적이 있습니다. 푸른 풀밭이 너른 마을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돌보는 귀한 경험을 하면서, ‘이게 내 일인데 왜 고민을 했지?’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아요.”

김민선 교수는 자신에게 있어 소아청소년과에 몸 담으며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너무 멋지고 좋은 일’이어서, 이 길을 선택하길 잘 했다는 자부심을 가진다.

크기가 고작 2.5cm남짓인 도토리는 60m에 달하는 거대한 참나무의 귀한 씨앗이다. 이제 첫 걸음마를 시작한 도토리하우스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증소아청소년 환아와 가족들이 잠시나마 기댈 수 있는 튼튼한 나무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을 김민선 교수와 도토리하우스 구성원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