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의 연속이다. 그 중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길이 나뉜다. 박철성 원장에게는 인생을 바뀌게 해준 소중한 인연이 있다. 소아마비 환자였던 자신에게 의술을 베풀어준 외국인 선교사와, 의사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격려해준 담임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박철성 원장은 도움을 받던 소년에서 도움을 주는 의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중한 인연을 만나 얻은 은혜를 더 많은 이에게 베풀고자 봉사하는 삶을 선택한 박철성 원장을 만났다.
글 편집실 사진 송인호
세상에 한 발짝 다가서게 한,
작지만 힘찬 첫걸음
인천광역시 부평구에서 박가정의학과의원을 운영하는 박철성 원장.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평생 의료봉사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추천포상 최고등급 훈장인 동백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 30년 동안 지체장애인, 뇌전증 환자 등 국내 소외계층은 물론 필리핀, 네팔 등 해외에서도 꾸준히 의료봉사활동을 펼쳐온 박 원장은 누군가로부터 받은 도움을 다시 다른 누군가를 위해 돌려드리는 것이 봉사의 선순환이라고 확신한다.
“제가 처음으로 해외 의료봉사를 간 곳이 필리핀 바세코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세계 3대 빈민가로 불릴 만큼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그곳 주민들은 결핵, 천식, 영양실조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어요. 더 안타까운 상황은 병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 대부분이 워낙 가난해서 제대로 된 진료조차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머물며 하루 500~6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다가 6·25전쟁 참전 용사였던 고령 환자를 만났는데, ‘당신 나라를 위해 우리가 목숨 걸고 싸웠었는데, 이제는 당신이 여기까지 와서 우리를 치료해주니 너무 고맙다’는 말씀을 듣고, 이 만남이 참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철성 원장은 그 자리에서 ‘당신이 우리나라를 지켜줬으니, 이제 내가 당신과 이웃들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27년째 바세코를 방문하며 의료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박철성 원장이 어렵고 힘든 이들을 위해 봉사의 길을 나선 데는 외국인 선교사 스탠리 토플의 선한 영향력이 큰 몫을 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던 저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자주 넘어져 다치고 놀림당하기 일쑤였어요. 그래서 어머니의 마음이 참 많이 아프셨을텐데,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버겁던 시절, 게다가 시골에 살던 처지라 병원 치료는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에 서양 의사가 와서 무료로 소아마비를 고쳐준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무작정 저를 업고 병원에 데려가셨는데, 그분이 여수 애양원(지금의 여수애양병원)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계셨던 스탠리 토플 선교사였어요.”
스탠리 토플은 1960~1970년대에 애양원 10대 원장을 지낸 인물로, 당시 수도나 전기시설조차 갖춰지지 않았던 애양원 내에 현대식 병원을 지어 한센병 환자 치료에 집중했다. 또 전국에서 유일하게 소아마비를 수술하면서 환자들을 위한 재활치료는 물론 자활을 위한 직업훈련까지 시행해, 많은 사람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전했다. 박철성 원장도 스탠리 토플과의 인연 덕분에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분이 자신에게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주었듯, 자신도 누군가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박철성 원장의 꿈이자 평생 과업이 이 시기에 정해졌고, 그는 세상을 향한 작지만 힘찬 첫걸음을 내디뎠다.
지속가능한 보건사업의 롤 모델을 만들다
소아마비 수술을 받고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한 박철성 원장은, 그때부터 천천히 걸음을 내딛어 세상과 만날 준비를 했다.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겁 많고 내성적이던 그에게 의사의 길을 제시해준 이가 담임이었던 김태곤 선생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소아마비 수술을 받았던 공간과 토플 선생님 옆의 의료진들, 소독약 냄새 등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래서 의학에 대한 동경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막연한 동경에 힘을 실어준 분이 김태곤 선생님이셨어요. 장애를 딛고 의사가 된 ‘노구치 히데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너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세상을 밝히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힘을 얻은 박철성 원장은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1994년 박가정의학과의원을 개원해 지역사회를 위한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의사가 되었으니 토플 선생님처럼 타인을 위해 베풀며 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지역사회를 돕자는 생각으로 병원 인근에 있는 은광원에서 봉사를 시작했어요. 은광원은 지체장애, 뇌병변장애 등 중증장애인들의 거주시설인데, 처음에는 아이들이 외부인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제대로 진료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꾸준히 왕진을 나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고,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늙어가고 있어요.”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를 꾸준히 해오던 박철성 원장은, 인생의 롤 모델이었던 토플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해외 의료봉사의 길 까지 나서게 되었고, 그곳 현장에서 보건사업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됐다.
“필리핀 바세코 의료봉사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갔어요. 하루에 800명이 넘는 사람이 몰렸으니 환자를 봤다기보다는 얼굴만 본 셈이죠. 저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양질의 진료나 그 밖에 환자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료봉사를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 로즈클럽인터내셔널에 가입했습니다. 여러사람의 힘이 모이니 훨씬 더 크고 의미 있는 활동들이 가능해지더군요.”
로즈클럽인터내셔널은 의료 나눔이 절실한 네팔과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봉사기관으로, 현지에 병원과 학교를 설립해 주민들을 위한 의료와 교육에 힘쓰고 있다.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박철성 원장은 한·네팔 친선병원의 메디컬 디렉터로서, 현지 병원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지에 병원을 지어준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보건사업에서 중요한 핵심은 지속성이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지 주민들 스스로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해요. 현대화 된 장비를 제공하고 의사를 교육하는 일이 무척 중요합니다.”
목마른 이에게 당장 물 한 잔을 주기보다는 우물로 가는 길을 알려주거나 아예 우물을 파는 법을 가르쳐주는 일, 이것이 박철성 원장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보건사업의 형태이다.
의사는 환자에게 온기를 전하는 사람
혼자 고군분투할 때보다 단체 소속으로 여러 사람과 협력하며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박철성 원장. 박 원장은 현장을 다니며 가졌던 포부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대학원에서 보건학을 전공했고, 이제는 봉사 설계자로서의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에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현장 책임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큰 까닭이다.
“가정의학과 의사이고 보건학을 전공했으며 현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어서, 어디에 어떤 도움을 주어야 효율적인지를 잘 알고 있어요. 이게 제가 가진 장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도움을 드린 병원이 현지 주민이 신뢰하는 지역 중심병원으로 성장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보람을 느끼고, 그 덕분에 큰 힘을 얻고 있어요.”
자신이 책임자로 있었던 한·네팔 친선병원을 비롯해 국내외 봉사현장에서 만난 의료봉사자들의 헌신과 열정에 큰 감동을 받았다는 박철성 원장. 봉사를 하러 가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온다는 그는 ‘의술(醫術)은 곧 인술(仁術)’이라는 말을 새삼 실감한다며 웃는다.
“우리 병원을 찾아주시는 환자 한 분 한 분이 굉장히 귀하고 감사해요. 이 분들이 있어 제가 더 아프고 힘든 분들께 꾸준히 나눔을 실천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입니다.”
의사는 환자들에게 온기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박철성 원장. 장애를 극복하고 의사가 된 자신의 이야기가, 지금 어려운 현실에서 방황하는 누군가에게 위안과 격려로 다가가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