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만남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일차의료를 책임지는 주치의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

우리는 누구나 건강하게 살고 싶고 가까이에 믿을 만한 의료기관이 있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또 아플 때 적절한 돌봄을 받고, 병들고 장애가 생겨도 존엄을 잃지 않으며 끝까지 나답게 살다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다. 의료진과 환자가 서로 신뢰하는 진료 환경, 지역사회와 건전한 관계맺음 속에서 제대로 된 건강돌봄이 이루어지는 마을의 주치의를 소망하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추혜인 원장의 이야기를 담았다.

편집실 사진 백기광

누구에게나,
어느 곳이나 방문 진료가 가능한 동네의원

추혜인 원장은 2012년 지역 주민과 의료인이 공동으로 자본을 출자해 병원을 운영하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살림의원을 개원했다. 348명이 뜻을 모아 출범해 현재 조합원 4,286명, 출자금 25억 9,000만 원, 연 이용자 수 5만 명 이상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추 원장을 비롯한 초창기 멤버들의 지난한 노력이 뒷받침됐다.

“의과대학 재학 시절 의약분업 관련 파업으로 의사와 일반 시민사이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의료협동조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주민들이 의사와 협력해서 함께 병원을 운영하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내가 어떤 진료를 하더라도 믿고 받아들이는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일본이나 국내 의료협동조합에 실습을 다녀온 후에 여기에서 일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즐겁고 건강한 삶을 사는 의료협동조합을 만들고 싶었던 추혜인 원장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뜻을 모아 지역사회 커뮤니티가 활발한 지역인 은평구에서 2009년부터 3년간 꾸준히 의료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 기간에 더 많은 주민을 만나려고 지역 축제에 참여하고, 건강강좌를 열어 의료협동조합의 취지를 알렸던 추 원장은 2012년 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살림의원을 개원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평등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병원 문턱을 낮추고, 본격적으로 방문 진료를 시작했다. 일차의료에서는 지역 주민에 대한 주치의 역할이 필요하고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의과대학 4학년 때 철거촌에 실습을 나간 적이 있는데, 당시 철거민들이 철거 용역들과 대치하고 있어서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방문 진료는 모든 곳에 필요할 수 있겠다고 깨달았고, 이후 요양원 촉탁의(요양원 협력병원 등에서 입소자 진료를 위하여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의사) 제도가 없어 돌아가신 어르신 환자들을 보면서 방문 진료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방문 진료는 누구나, 어느 곳이나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추혜인 원장은 지금까지 일주일에 한 번은 방문 진료를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지킨다. 하지만 너무 멀리서 왕진 요청이 들어오면 인근 의료기관을 연결해주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다른 방문 진료 의료기관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그곳으로 연결해드리고, 저희도 그렇게 의뢰를 받고 있어요. 심평원 홈페이지에서도 방문 진료 의료기관을 검색할 수 있는데, 실제로 방문 진료를 시행하는 의원 수가 적은 것이 현실입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방문 진료를 실시하는 의료기관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의료복지협동조합을 꿈꾸며 선택한 길

추혜인 원장이 몸담고 있는 살림의원은 가정의학과를 비롯해 산부인과, 정신과, 방문 진료 전담의 등 총 6명의 의사로 구성돼 있다. 의대 실습을 돌면서 대부분의 과가 적성에 잘 맞았다는 추혜인 원장이 가정의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오랜 시간 꿈꾸며 계획해온 의료복지협동조합에 필요한 의사가 되고 싶어서였다.

“학생 실습이나 인턴 과정에서 여러 과를 도는데, 저는 모든 과가 다 재미있고 의미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많은 과를 다 볼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어서 응급의학과와 가정의학과 사이에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의료복지협동조합에서 일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좀 더 주치의 같은 진료를 하는 것이 쓰임새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정의학과로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남들은 어렵다는 응급의학과에서 6개월 동안 ‘재미있게’ 인턴 생활을 했던 추혜인 원장이었기에 그 결정에 주변인들이 더 놀랐다고 하는데,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본 사주풀이가 운명을 갈라놓았단다. ‘응급의학과를 가면 본인이 재미있게 살 것이고, 가정의학과를 가면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에 이끌려 후자를 선택했다는데, 아마 다른 과를 갔으면 지금처럼 열심히 성실하게 살지는 못했을 것이라며 웃는다.

추혜인 원장이 누구나 평등하게 진료받을 수 있는 여성주의 병원을 구상한 것은 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피해자 입장에서 진료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당시 재학 중이던 공대를 그만두고 다시 의대에 입학했고, 의사가 된 지금도 그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 병원이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와 주치의 협약을 맺고 있는데, 피해자들은 임시사회보장번호를 받을 때까지 진료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나 아버지의 건강보험증 번호를 같이 쓰기 때문에 자칫 쉼터가 노출될 수 있어서죠. 그래서 임시사회보장번호가 나올 때까지 우리 병원에서 무료 진료를 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살림의원은 성소수자 진료를 위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추혜인 원장의 생각은 확고하다.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사회적 차별이 없어져야 한다고 믿는 까닭이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의사의 역할’에 대한 성찰

지금 우리나라 의료계는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추혜인 원장은 ‘의사’로서의 역할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 조합원 중 고관절 골절로 수술을 받기 위해 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은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고령이어서 항암치료는 어려운 상황이라 고관절 수술만 받고 퇴원하셨죠. 방문진료를 나가서 가정간호서비스와 암환자 산정특례(진료비 부담이 큰 암 등 질환 진료 시 본인부담률을 경감해주는 제도), 호스피스완화의료 등 세 가지를 신청하시라고 권유해드렸습니다. 환자 본인과 보호자들이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생각이 확고하셔서 가정 임종교육을 해드렸고요. 며칠 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셨고 장례 절차까지 무사히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제 길을 잘 가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우리의 역할, 책임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지역을 기반으로 지역 주민이 직접 운영하는 의료기관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 되는 일이기도 할 터. 주치의 제도가 없는 데다, 지역 주민이 의료기관 운영에 참여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추혜인 원장은 먼저 이러한 지역 기반 의료기관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가 달라져야 하고, 이를 자신들이 보여드려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앞으로도 조합원들과 함께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전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 의료는 과도하게 이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용되는 의료자원을 줄일 수 있도록 설득하고 교육하는 것도 의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제공하는 의료가 적정한 정도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또 환자, 보호자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한 의사가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