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해하기 전,
먼저
정상의 범위를
확인하자
글 하지현 건국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어지럼증을 호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혈압을 재보니 90/60mmHg라면
“혈압이 낮아서 어지러웠네요”라고 원인을 말할 수 있다.
치료 역시 원인에 맞춰서 하면 된다. 의학은 이렇게 증상에 대한 객관적 원인을 찾고, 비정상의 기준을 만들어온 역사다.
여기에 맞추기가 어려운 영역이 정신건강의학이다.
“불안해서 힘들어요”, “슬프고 우울해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영상을 찍거나, 피를 뽑아서 똑 떨어진 진단을 하기 어렵다. 자기 보고식의 설문을 하지만 주관적인 면이 커서 당사자가 불안하다면 불안하구나, 우울하다면 우울해한다고 인정을 할 수밖에 없다.
최첨단 의학이 발전한 21세기 정신과 의사의 딜레마다.
최근 들어 부쩍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과거와 비교하면 현대사회는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지만, 경쟁이 심해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주거와 교통 등 모든 부분이 편리해지니 과거에는 불편하다고 느낄 만한 것들이 어느새 ‘고통’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렸다. 실내가 더우면 조금 기다리면 견딜 만해질 테지만 바로 에어컨을 틀어야 한다. 관공서나 은행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10분만 지나면 짜증부터 올라온다. 동시에 경쟁은 엄청나게 격해졌다. 언제나 남과 비교하고 한 번만 뒤처지면 영원히 밀릴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한 번의 실패가 있을 수 있는 실수나 쉬어감으로 인식되지 못한다. 가려는 곳은 저 멀리 있는데 나는 겨우 여기 머물러 있다는 인식은 우울감을 주기 쉽다. 이런 두 가지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관적으로 불안과 우울을 이전보다 훨씬 많이 느끼게 만들고 있다. 세상은 편해졌는데 불안해하는 사람은 늘어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모두 불안장애이고, 우울증에 걸린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누구나 하나 정도의 정신질환이 있잖아”라는 사람들의 말이 맞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증상이라 느끼는 문턱이 많이 낮아지고, 경쟁으로 자주 비교하고 좌절을 경험하는 빈도가 늘어났을 뿐이다. 우울과 불안을 없애달라고 호소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정상의 범위를 정확히 이해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우울과 불안을 호소해도 늦지 않다. 이제 정상의 기준을 따져보자.
정상의 기준 세 가지
첫 번째 기준은 '있을 것이 다 있고, 없어야 할 것은 없는 것'이다. 의학적 측면에서 가장 고전적 정상이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발가락과 손가락 개수를 세는 것과 같다. 암 조직과 같은 없어야 할 병소가 없는 것이 정상이다. 정신건강 측면에서는 환청이 들리거나, 자살사고나 공황발작이 존재하지 않다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걸 확인하는 과정이다. 여기에 더해서 자신이 원래 하던 일상의 기본적인 것들을 다 해내고 있다면, 그것도 정상이다. 회사원이 결근하지 않고 큰 실수를 하지 않고 근무하는 것, 학생이 조퇴나 결석 없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면 일단은 정상범위다.
두 번째는 정상범위 안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일정 숫자 이상의 집단을 이루면 자연환경에서는 정규분포를 형성한다. 밥그릇을 거꾸로 놓은 것 같은 역U 모양의 곡선을 만드는데 평균이 아닌 중앙값이 가장 많고, 양옆으로 퍼져 나가는 분포를 그린다. 이때 양쪽 끝으로 갈수록 급격히 그 빈도는 줄어든다. 표준편차를 감안해서 2.5% 정도 밖으로 나가면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지능지수(IQ)다. 지능이 70 이하로 측정된다면 하위 2.5%에 속한다. 100명 중에 98등에 속하는 셈이니 이 정도면 비록 30점이 낮은 것에 불과하지만 비정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는 합의를 한 것이다. 이를 성격에 적용하면 꼼꼼함과 지저분함도 가능하다. 집을 치우는 일에 한쪽은 매일 물걸레질에 소독까지 해야 마음이 놓이고, 다른 한쪽은 더는 입을 옷이 없고, 담을 그릇이 없을 때까지 세탁과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면? 각자 상대를 비정상으로 판단하기 쉬울 것이다.
공동체가 정해놓은 좁은 기준이 문제
세 번째 기준은 발달의 궤적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운동 발달로 보자면 아이가 생후 6개월에 목을 가누고 앉고, 1년이 되면 걸음마를 하고, 36개월 정도면 소변을 가리는 노력을 하는 게 정상이다. 만일 1년 이상 늦어지면 정식으로 평가를 해봐야 한다. 심리발달이나 사회적 적응도 이와 유사한 궤적이 있다. 말을 하는 것, 친구를 사귀는 것, 엄마와 떨어져도 덜 불안해하는 것과 같은 것이 기본적이다. 여기에는 사회문화적 기준도 함께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 부분에 엄격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입학해야 하고, 그다음에는 취업해야 한다. 30살을 기준으로 결혼과 출산에 대한 발달점이 주어진다. 마치 걸음마를 하려는 아이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부모의 눈과 같이. 만일 이런 사회적 궤적에서 많이 벗어나거나, 기대하는 다음 단계로 진행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부모뿐만 아니라 친척, 주변 사람 모두가 비정상의 눈으로 본다. 설과 추석마다 친척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운 젊은이들의 불안과 우울이 무신경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학교는 어디 다니니?" "취업은 했니?" "결혼은 언제 해?" "결혼한 지 몇 년인데 왜 아이가 없니?” 무시하려고 해도 몇 번 듣다 보면 어느새 내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인식하게 되어버린다. 별일이 없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해서 잠이 잘 안 온다.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지 못하고, 결혼하지 않은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지며 우울해지기 일쑤다. 딱딱 진도에 맞게 한국 사회 공동체가 정해놓은 보이지 않는 타임테이블에 따라 살아가야만 정상이라고 여기는 너무 좁은 기준이 문제다.
완벽보다 기본을 먼저
이렇게 세 가지 정상의 기준을 놓고 보도록 먼저 생각해보자. 우울과 불안은 누구나 일시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나도 하루에 몇 번은 살짝 불안과 비슷한 걸 느끼고, 기분이 처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사실은 가야 할 곳에 늦어서 긴장한 것이 일시적으로 과했거나, 오후가 되어 피곤한 것을 기분이 처진 것으로 인식한 것일 때가 더 많다. 편리함을 추구하고, 심한 경쟁 안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면 불편이 불안으로, 피곤이 우울로 느껴지기 쉽다. 불안에 대한 불안이 진짜 불안을 만들고, 우울을 많이 느낄수록 자기 확신은 떨어지고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불안과 우울이란 증상을 병의 일환으로 보고 없애려 하기보다 정상의 범위를 먼저 그려보았으면 한다.
나는 완벽을 추구하는 것에서 기본을 해내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를 권하고 싶다. 남들과 비교해서 아주 잘하기를 바라기 보다, 남들이 하는 만큼만 전체적으로 평균 안에 들어가는지 확인해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맨 밑으로 떨어져서 낙오하지 않을 정도로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문화적으로 정해놓은 사회적 발전의 궤적은 무시하자. 한 군데 머무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고, 남들이 다하는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걸 우리는 개성이라고 하고, 좋은 사회일수록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이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해보자. 정상의 범위를 이렇게 정확히 알고 전보다 확대하는 것만으로도 그전까지 꽤 고통스럽게 느끼던 불안과 우울은 어느새 수준이 낮아져서 물밑으로 가라앉아 전보다 편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평온한 마음과 정신의 건강함은 여기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