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에 걸렸으면 당연히 우울하지.” 아주 쉽고 간단한 연상이다. 그렇다면 모든 암 환자에게 우울증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낙담하고 우울해할 수 있지만, 곧 안정을 찾고 더 열심히 치료를 받고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좋아지고 난 다음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력이 더 강해진 경우도 많다. 인간은 좋지 않은 상황에 적응을 잘하는 개체인 덕분이다. 따라서 이런 직관적 연결은 피해야 한다. 더욱이 과거와 비교할 때 암 치료 결과는 좋아졌고, 암으로 진단받은 이후 생존해 있는 사람이 10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이 모두 ‘당연히 우울증’이 있다면 정신건강의학과는 북새통이 되어 다른 치료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심리적 추측보다 전문적 평가가 필요하다.
글 하지현 건국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교수님, 제 환자 한 분 봐주실래요? 우울증이 아닌가 싶어요. 밝은 분이었는데,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식사도 안 하시고···."
종양혈액내과 교수가 환자를 봐달라고 부탁해 병동에 올라가 보았다. 올해 45세인 김미숙 씨는 유방암 환자다. 3년 전 암으로 진단받고 수술했고, 방사선치료 후에 항암요법을 받은 후 잘 지냈는데, 1년 전 뼈에 전이가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전신 쇠약감과 통증으로 입원했다. 많이 수척해진 상태였다. 젊은 나이였고 처음 재발했을 때만 해도 씩씩하게 다시 항암치료를 하면 좋아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통증이 심하고 몸이 견디기 힘들어지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다. 누가 봐도 우울할 만한 상태였다.
기운을 내려고 억지로라도 먹으려고 애를 쓰지만, 식욕이 뚝 떨어져 괴롭다고 호소했다. 밤에 한 번 깨면 다시 자기 어려워 힘들어했다. 이 환자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지친 상태가 지속돼 우울증으로
김미숙 씨의 상태는 일단 ‘지쳤다’는 점이 분명했다. 이를 의기소침(demoralization)이라고 한다. 우울증과는 조금 다르다. 오랜 치료와 반복되는 재발과 통증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다. 우울증과 달리 감정적 반응이 살아 있고, 현실적인 걱정을 하는 수준이지 지나친 절망이나 죄책감은 없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을 때는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이런 면만 있는 경우는 우울증으로 진단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분은 여기에 더해서 식사와 수면에 확연한 어려움이 생겼다. 전에는 그래도 먹고 싶은 것이 있어서 보호자에게 아이스크림, 주스 등을 부탁하기도 했고, 통증으로 깰 때 말고는 잠을 깊이 잤는데 최근 2주 동안은 체중이 3kg이나 빠지고, 4시간 이상은 못 자고 있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더 힘들다. 의기소침을 넘어 전형적인 우울 증상이 시작된 것이다.
신체 질환이 장기화하면서 뇌에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지는 변화가 오고, 여러 이유로 신체에 발생한 염증 등이 뇌에 영향을 미치면서 이차적으로 우울증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우울증을 본격적으로 치료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환자와 주치의에게 설명했다. 수면을 도와주고 식욕을 돋우는 효과가 있는 항우울제 ‘머타자핀’을 처방하고 1주일 후 재방문했다. 한결 밝은 표정이었다. 전보다 식사도 잘하고 무엇보다 잠자는 시간이 늘어나서 견딜만하다고 했다.
환자의 삶의 질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의지만 강하면 어떤 병도 이길 수 있다.' 이건 참 미련한 말이라 생각한다. 또 암에 걸렸으니 당연히 우울할 것이라는 가정 아래 아무 항우울제나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정확한 평가와 처방으로 확연히 삶의 질이 좋아질 수 있다. 물론 정신건강 의학과적 치료가 암을 근본적으로 좋아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항암치료 기법이 발전할수록 암을 갖고 살아가는 시간은 길어졌다. 이제는 생존도 중요하지만, 그 기간 삶의 질도 중요하게 여길 때가 된 것이다. 치료에만 전념하기보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평소 좋아하는 활동을 유지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능하면 직업 활동을 하도록 권유했다. 하지만 이때 우울증 환자는 혼자만의 의지로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 정신건강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암을 맞닥뜨린다는 것은 만성적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다. 매에 장사가 없다는 말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점점 지쳐가고, 어느 선을 넘어가면 정신적 에너지가 회복되지 않는 상태가 되면서 우울 증상이 생긴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 정도 기운이 없어서 산책과 같은 매일 하던 활동을 하지 않는다. 보통은 곧 회복되었는데 우울증이 생기면 1~2주 이상 지속되고 기운이 올라오지 않는다. 더욱이 식욕이 떨어져서 식사량이 줄어들고, 잠의 질이 안 좋아진다. 한마디로 에너지 회복의 길이 막힌 것이다. 신체 상태는 더 안 좋아지고 올 게 왔다는 우울증적 부정 사고는 더욱 강화된다. 이를 심리 용어로는 ‘자기 예언 충족’ 이라고 한다. 일종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혼자 벗어나기 쉽지 않다. 가족이나 의료진이 우울증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적극적으로 평가와 치료를 해야한다. 우울증은 충분히 호전이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암 환자 중 구강암, 췌장암, 폐암, 유방암에 걸린 환자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고 많게는 40%까지도 보고된다. 진행이 빠르고, 통증이 심하고, 숨 쉬고 먹는 일상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부위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몸 상태가 나쁘거나 병기가 많이 진행되거나 통증이 심해서 힘들어할 때, 과거에 우울증을 경험한 경우, 실직과 같은 일상생활 스트레스가 겹쳤을 때 우울증 위험도가 높아진다. 때에 따라서는 항암제나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스테로이드 제제, 면역억제제, 방사선치료 등이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뇌에 전이되어 우울 증상이 관찰되는 예도 적지 않다. 이런 전반적인 가능성을 열어두고 평가하는 것이 암 환자의 심리적 측면에 경험이 많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일이다.
고립감에서 벗어나
서로 이해하는 경험이 중요
암 환자나 가족 중 일부는 여전히 정신건강의학과의 문턱을 높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 주관적 통증, 불안과 우울, 식사와 수면 등을 관리하고 활동량을 늘리면 훨씬 더 편해질 수 있는데 정신과에 대한 편견, 의지로 극복할 문제이지 치료를 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 암에 걸리면 당연히 슬프고 우울한 것이라는 체념적 판단에 진료실 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만일 내가, 혹은 가족 중 누군가가 암 투병 중인데 전보다 우울한 감정이 두드러지고, 최소한의 생활을 하지 못하는 시간이 2주 이상 지속되는 면이 보일 때는 전문적 평가와 필요한 치료를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에 더해 암 환자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권하고 싶은 것은 집단치료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같은 경험을 가진 환자들끼리 모여서 진단받고 치료받는 과정, 생활하면서 경험하는 힘든 부분을 공유하는 것이다. 전이된 유방암 환자들이 집단치료를 받으면 그렇지 않은 환자와 비교할 때 평균 1년 반가량 더 생존했다는 연구가 있다. 매주 치료에 참여하기 어려운 거리라도 걱정 없다. 온라인 카페도 많이 활성화되어 있으니 참여해서 암 환자가 흔히 갖는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만 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집단치료 수준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암 환자 100만 명이 넘은 지금 우울과 불안이란 감정의 문제도 적극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