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다운 삶과 죽음이라는
권리를 위해
환자를 찾아가는 사람들
우리동네30분의원
정혜진 원장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환자 한 사람을 제대로 돌보기 위해서는 의료, 돌봄, 복지의 영역이 어우러져야 한다. 방문 진료를 하면서 의료 소외계층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바뀌었다는 정혜진 원장. 장기요양보험의 방문간호지시서 작성을 계기로 환자 방문을 시작한 이래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방문 진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각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글 편집실 / 사진 송인호
방문간호를 계기로 시작된
방문진료의사의 길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우리동네30분의원은 의사 한 명과 간호사 한 명으로 운영되는 작은 의원이다. 이곳은 15~30분 진료를 원칙으로 하며 건강검진 전후 상담이나 성인 예방접종, 감기나 장염 같은 급성 경증질환을 비롯해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 관리와 스트레스, 불면 등 몸과 마음의 어떤 증상이든 상담할 수 있다. 최소 진료시간을 15분으로 정한 까닭에 예약은 필수지만, 오랫동안 이 병원을 찾는 ‘단골’이 많다. 환자가 중심이 되는 의료서비스를 받는다는 만족감이 높기 때문이다.
정혜진 원장은 일주일에 5일을 진료하는데, 그중 1.5일은 방문 진료에 할애하고 있다. 12년 전, 방문간호지시서를 작성하기 위해 환자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해 방문진료 횟수를 차츰 늘려왔기 때문에 주 1.5일의 방문진료가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처음 시작되었을 무렵 방문간호센터를 운영하던 간호사 선생님이 찾아와 방문간호를 시작하려면 지시서가 필요한데 대부분 어르신이 의원까지 나올 수가 없으니 환자 집에 함께 방문해서 지시서를 작성해줄 수 있겠냐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선뜻 따라나선 것이 방문 진료의 시작이었습니다.”
방문간호지시서는 6개월에 한번 작성하게 되어 있어 대개 6개월마다 어르신의 가정을 방문하는데 대부분 컨디션이 좋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던 이들이 방문진료·간호를 통해 적절한 서비스를 받으면서 신체적·정신적으로 회복하는 것을 자주 보면서 환자의 집에 방문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의료사각지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전환
정혜진 원장은 방문간호지시서를 작성하기 위해 어르신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꼈다. ‘지시서 만료 기간은 아니지만, 왕진을 와줄 수 없냐’는 요청을 들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일차의료 방문진료 수가 시범사업이 시작돼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뭔가 제대로 할 수 있어서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말한다.
“방문 진료는 거동이 어려운 분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평소 외래에서 진료를 보던 환자들보다 중증도가 높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코로나19로 병원에 입원하지 못하고 집에 계시는 분들이 종종 방문 진료를 요청하시는데 의료서비스를 받기 어려운 상황 에서 의사가 집으로 방문하는 것만으로 안심하기도 하시지만, 방문 현장에서 해드릴 수 있는 의료적 처치는 한계가 있다 보니 안타까운 일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치매 어르신의 경우 당사자가 병원 방문을 거부해서 보호자가 방문진료를 요청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오랜 시간 제대로 된 진단을 받지 못해 인지기능뿐 아니라 신체적인 문제도 체계적으로 관리되어 있지 않았어요. 방문 진료를 통해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환자와 가족들이 점점 일상생활을 되찾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방문 진료가 정말 유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혜진 원장에게 방문 진료는 의료사각지대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에서 배웠던 의료사각지대란 개념은 돈이 없거나, 주민등록이 없거나 혹 은 지역적으로 소외돼 의료접근이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분들이 겪는 고충 정도로만 이해했었는데, 지금은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방문 진료를 하면서 삶의 어떤 순간에 대비할 겨를 없이 의료접근성이 매우 낮아졌거나 또는 적극적인 치료를 받지 않기로 하면서 병원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는 순간들이 생기면서부터 의료 서비스에서 소외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그룹이나 계층의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나도 언젠가 삶의 특정한 순간에 의료로 부터 소외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문 진료는 물리적으로 의료서비스에 닿지 못하는 경우이거나 적극적 치료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후에 임종을 맞이하는 과정에도 안정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병·의원 중심의 의료에서는 커버할 수 없었던 소외된 틈새들을 방문 진료가 메꿔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방문 진료의 긍정적인 선례가 쌓이길
환자의 집에 방문한다는 것은 의사에게도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진료실이라는 갖춰진 환경에서 진료하는 것과 달리 환자가 사는 동네, 집의 구조, 위생 상태, 먹는 음식, 덮고 자는 이불, 집에서 나는 냄새, 환기 상태 등 진료실에서는 알 수 없는 다양한 정보가 있고, 이처럼 예상치 못한 무수한 정보는 환자를 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해석하지 못해서 혼란이 생기기도 한다.
“환자의 집에 들어갔을 때 어떤 음식을 먹는지, 잠자리는 어떤지, 어떤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진료 안에 포함되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방문 현장에서 만나는 분들은 진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복지 서비스들과 연계되어야 하는 필요성이 커요.”
이를 위해 정혜진 원장은 방문의료연구회라는 모임에서 『환자를 찾아가는 사람들-방문의료 이야기』이라는 책을 발행해 방문 의료를 알리고 방문 의료에 관심은 있지만, 선뜻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교육과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다.
“일차의료 방문진료 수가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기관의 수가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 ‘1인 의사 + N명의 간호조무사’ 구조가 많은 개원가에 방문 진료는 높은 허들일 수밖에 없어요. 낮은 방문 진료 수가도 현실적인 어려움 중 하나로 작용하고요. 방문 의료가 확장되기 위해서는 방문 진료에 대한 교육, 사례 공유, 행정적 지원 등을 담당할 거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현장에서 활동 중인 의료기관들이 긍정적인 선례들을 쌓아나가는 것도 필요하겠죠.”
정혜진 원장은 일차의료 방문진료 수가 시범사업이 확대·정착되어 의과대학 교육과 정에서부터 “환자의 집에서 진료를 본다”는 교육이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말한다. 환자들이 자신이 사는 곳에서 의료적 소외를 받지 않고 안전하게 자신의 삶을 누리려면 일차의료 방문진료 수가 시범사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본 시범사업의 성공적인 안착을 바라는 그녀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