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만남

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왕진 의사입니다!

장현재 원장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25년 고령인구 비율 20.6%로 초고령사회에 들어설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거동이 불편해 병원에 오지 못하는 의료 취약계층이 늘어나면서 병원이 아닌 곳에서도 진료받을 권리, 지역사회에 머물며 돌봄 받을 권리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환자들을 방문하며 돌보고 있는 24년 차 왕진 의사 장현재 원장을 만나 초고령사회를 앞두고 준비해야 할 의사의 역할에 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편집실 / 사진 백기광

지역사회에서 신뢰받는 왕진 의사

얼마 전 EBS<명의> 프로그램 ‘ 나는 왕진 의사입니다’ 편이 방송된 후로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 정신없이 바빠졌다는 장현재 원장. 요즘 시대에도 방문 진료를 다니는 의사가 있는 줄 몰랐다며 꼭 찾 아와달라는 요청들이 쏟아져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독거노인과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IMF 외환위기 때 상계동에서 개원했는데 진료비가 없어서 병원에 오지 못할 만큼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백사마을은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어서 환자가 오지 못하면 의사가 직접 가정을 방문해서라도 돌봐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왕진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2 0년 넘게 지역 주민들을 만나오다 보니 그분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가뜩이나 환자가 많은 병원을 운영하면서 한두 명이라도 더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에 점심시간을 쪼개 왕진을 다녀온다는 장현재 원장은 자신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얼굴이 떠올라 아무리 고되어도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단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병원이 할 일이 많아지면서 예전보다 더 바빠진 건 사실이에요. 이 시국에 의사가 할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신속항원검사와 전화 진료를 하고 기존 환자들 진료에 왕진까지 다녀오려니 몸은 좀 고되지만, 마 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 각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특히 감염에 대한 우려가 커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제가 왕진을 가지 않으면 그분들은 변변한 진료를 받을 수가 없어요. 저를 믿고 기다리는 데다 너무나 딱한 처지에 놓인 분이 많다 보니 이 일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장현재 원장은 마음이 식으면 왕진을 그만둘 수도 있겠지만 심장이 뜨겁게 뛰는 한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다만 자신의 ‘유난스러운 신념’ 때문에 병원 식구들까지 일이 많아진 점은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웃어 보인다.

국민의 신뢰와 존경이 최우선되어야
하는 방문 진료 시범사업

장현재 원장은 지역구의사협회 회장, 개원의협의회 총무부회장을 비롯해 의사협회의 여러 보직을 두루 거치는 등 왕성하게 활동을 해왔다. 지난 2019년, 일차 의료 왕진 수가 시범사업을 시작할 당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그는 고령화사회에서 의료계의 역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다. 여기에는 쓰러져가는 판잣집에서 추위와 싸우고 있는 환자들을 마지막까지 진료하면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집에서 임종을 맞고 싶어 하는 환자들의 바람이 크게 와닿았던 이유도 작용했다.

“연세가 많은 노인 환자들은 자신이 생활하던 집에서 임종을 맞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세요. 하지만 지금의 의료 현실에서는 77% 이상이 병원에서 돌아가시는 상황이에요. 방문 진료 시범사업은 노인과 장애인 등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주거지에서 보건·의료·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의미 있는 사업이지만, 전국 의사 10만 명 중 345명 정도만 참여하는 실정입니다.”

장현재 원장은 머지않아 초고령사회에 접어들면 왕진이 필요한 환자들이 더 늘어날 텐데 지금의 병원과 요양시설만으로는 감당하기에 역부족인 실정이라 안타까운 마음이다. 현저히 낮은 진료비용과 현실적이지 못한 의료수가 때문에 방문 진료에 참여하는 의료진이 적을 수밖에 없다.

왕진은 의료진이 환자가 있는 곳까지 직접 찾아가는 시스템이어서 하루 두세 명 정도만 진료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다른 환자를 볼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만큼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의료기관의 참여를 끌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2019년 시범사업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참여인원이 적고, 의사들 사이에서도 찬반 의견이 갈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저를 이해 못하는 분도 많을테고요. 의사는 국민에게 존경받는 직업군이라 생각합니다. 설령 이 사업이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일단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말하는 의사들이 많았으면 해요. 국민의 신뢰를 받는 것이 먼저고, 수가는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해요.”

의사가 된 것이 고마운 사람

파킨슨병으로 거동을 못 하고 집에서만 누워 지내는 환자, 온기 하나 없는 차가운 방바닥에 몸을 누이고 홀로 지내는 기초생활수급자.

이 밖에도 요양병원이 아닌 집에서 돌봄을 받고 싶어 하는 많은 환자가 장현재 원장이 방문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 위급한 응급 상황이 아니면 병원에 가기 어렵고 설사 가더라도 해줄 게 없다는 말을 듣는 이들이어서 왕진 의사는 꼭 필요하고, 큰 힘이 되는 존재다.

“저는 늦깎이로 의사가 되었고, 그 전에 다양한 사회생활을 경험해서 그런지 환자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여느 의사들과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겪어온 터라 소외된 사람들이 느끼는 고충을 잘 이해하고 있어요. 처음으로 나선 왕진 길에서 받았던 따뜻한 환대, 소박하지만 진심이 전해지는 감사 인사에 의사가 되기를 참 잘했구나, 이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의사여서 참 고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런 마음을 잊지 않으려 했던 것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왕진을 다니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강산이 두 번은 더 바뀔 시간 동안 이 일대를 지켜온 동네 병원이기에 주민들과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며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장현재 원장은 사회가 고령화될수록 개원의의 힘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요즘 자녀들과 따로 사는 노인도 많고 1인가구도 늘고 있어 이들을 위한 각별한 건강관리가 필요해요. 대형 병원만 고집하며 기다리기보다 가까운 동네 병원에서 꾸준히 관리해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시대가 변하면서 동네 병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같은 1차 병원이 지역 의료서비스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비롯한 여러 기관과 더욱 활발하게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하면서 개원의에 대한 배려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