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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만남

상처 입은 마음에
'자유'를 새기는 치유자
메디컬 타투이스트

빈센트의원
조명신 원장

타투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타투 시술을 할 수 있는 자격은 본래 의료인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의료인이 아닌 이들에 의한 무분별한 불법시술이 이루어지고, 특정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음지 문화가 형성되기도 하면서 타투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좋지 않은 시선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합법적인 자격을 갖춘 의사가 타투이스트가 되어 타투를 하고 싶은 이들에게 자유를 주자’, 조명신 원장이 메디컬 타투이스트로서 첫발을 내디딘 이유였다.

편집실 사진 윤선우

우리 사회의 숨은 히어로를 기억하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조명신 원장은 미국 상공을 날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학회 참석차 비행기에 탑승했던 것이다. 회항을 하면서 가슴 아픈 비극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다시 방문한 미국에서 만난 한 중년 여성이 새긴 타투를 보면서 큰 가르침을 얻었다.

“기차에서 만난 한 여성의 팔에 타투가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길게 나열돼 있었어요. 911 테러 당시 순직한 소방관들의 이름이라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우리의 히어로인데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가 기억해?’ 그 말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우리나라에도 헌신적으로 사회 구조를 지탱하는 분이 많이 계시니 이분들을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때를 계기로 조명신 원장은 우리 사회에서 위험에 노출된 직업군을 대상으로 그들이 원하는 타투를 새겨주는 ‘히어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첫 대상자는 소방대원들로, 화재 진화 과정에서 입은 화상을 타투로 덮어주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 보람도 컸다고 말한다. 코로나19 시기에는 응급실을 사수했던 의료진, 구급차 기사들을 대상으로 했고, 기자, 군인, 경찰 등으로 범위를 확대해갔다. 이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히어로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애쓰신 분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그간 100여 명이 넘는 소방대원이 다녀가셨는데, 그분들이 원하는 대로 타투를 해드렸어요. 하트를 새겨달라는 분들도 계셨고, 의미 있는 글을 써달라는분도 계셨어요. 어깨에 커다랗게 난 화상 자국을 가리기 위해 햇살이 비추는 소방관의 옆모습을 그려드린 적이 있는데 결과물이 만족스러우셨는지 고맙다며 환하게 웃고 돌아가는 모습이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타투를 지우고 새기는 것은
곧 마음을 치유하는 일

조명신 원장이 진행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작업이 치매 환자를 위한 타투다. 치매 노인은 실종방지 팔찌나 목걸이 등이 있지만 착용하지 못한 채 외출해서 실종될 수도 있기 때문에 몸에 연락처를 새겨 환자가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취지다.

“치매 어르신이 가출하셨다가 실종 3일 만에 찾았는데 행색이 너무 남루해서 가족들이 많이 속상해하셨습니다. 소지품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다 없어진 상태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던 거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전화번호나 주소를 새겨달라는 가족의 요청에 타투를 시술한 것이 조명신 원장에게는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딸의 손에 이끌려서 온 아버지, 한때는 가족을 책임졌던 믿음직한 가장이었던 아버지의 약해진 모습을 보면서 치매를 앓는 분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도움을 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이런 일은 돈을 받을 일이 아니잖아요. 무료로 시술해드려서 좀 더 많은 분께 도움이 되면 좋겠는데 가족들 입장에서는 시술을 많이 망설이시기는 합니다. 치매 환자에게 타투 시술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환자 당사자의 적극적인 동의인데 본인보다 가족의 필요에 의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진행이 쉽지 않아요.”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치매를 바라보는 인식이 부정적이고 가급적 쉬쉬하는 분위기여서 상담만 받고 대부분 그냥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억지로 해서 될 일이 아닐 터. 병원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필요할 때 언제든지 오시면 좋겠다고 말한다. ‘메디컬 타투이스트’, 조명신 원장을 나타내는 수식어이자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타이틀이라 생각한다. 의사로서 타투라는 의료 행위를 통해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해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까닭이다.

성격상 남이 하지 않는 일에 도전해서 뭔가 해보는 게 그렇게 좋다는 조명신 원장. 법적으로 타투는 의사만 시술할 수 있는데 정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자신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의료적인 환경 외에서 불법으로 무분별하게 성행하는 타투 문화가 안타까워 음지에서 양지로 끄집어내고 싶다는 소신도 담겨있었을 터다.

“처음에는 타투를 지우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레이저를 이용해 깨끗하게 지울 수 있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냥 피부를 다 오려냈어요. 당시 팔에 새긴 타투를 지우고 싶다고 40대 남성분이 병원에 오셨는데 팔에 새겨진 장미 무늬가 너무 예술적으로 뛰어나서 놀랐습니다. 지우기 아깝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것 같아요. 이 멋진 작품을 왜 지우려 하냐고 물으니 아이가 목욕탕 갈 때마다 쳐다보고 자꾸 물어보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젊을 때 자해한 흉터를 덮기 위해 타투를 했던 건데 자식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고 힘든 거죠. 묻혀 있던 과거를 다시 들춰내 또다시 상처를 입으시는 거잖아요.”

타투가 삶의 무게만큼 무겁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조명신 원장은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타투를 지운다. 또 어릴때 입은 상처, 화상 자국, 백반증 같은 피부질환으로 오랜 기간 상처를 가지고 살아온 이들이 심리적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타투를 새겨 상처를 덮는다. 타투를 지우고 또 새기는 일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조명신 원장은 앞으로도 여력이 있는 한 메디컬 타투이스트이고 싶다.

자유를 꿈꾸는 의사

1997년 성형외과의원을 개원한 이래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는 성실한 의사로 임하고 있지만, 조명신 원장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이 도사리고 있다. 남들이 하지 않는 특별한 것을 좋아하고 인생을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아 하는 기질이어서, 현재 삶에 만족하기보다 혹시나 자신에게 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가 많다고 말하며 웃는다.

“어려서부터 <인디아나 존스>처럼 전 세계를 떠돌면서 새로운 발견을 한다든지 뭐 그런 걸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과거에 탄광 부속병원과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공중보건의 생활을 했었으니, 지금처럼 병원에만 머물러 있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만족도는 떨어지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타투가 가지는 자유로움에 더 매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0대 남성 환자의 장미 타투에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한 조명신 원장은 미국에 있는 타투 학교를 수료하는 등 메디컬 타투이스트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동료 의사들, 심지어 가족들의 이해도 얻지 못했지만 조 원장은 타투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타투는 상당히 창의적인 작업이어서 그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이 크다는 조명신 원장은, 무엇보다 타투를 통해 상처가 가려졌을 때 안도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매우 뿌듯하고 만족감이 들어 이 길을 선택하길 잘했다고 확신한다.

“지금과 달리 2002년 월드컵 이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회에서 특히 타투는 조폭, 혹은 유흥업소 종사자들이나 한다는 인식이 강했죠. 당시에도 타투를 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있었고, 그 분들이 적절한 곳에서 시술받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대개 미군부대 근처에서 미군을 상대로 하던 사람들이 해주다 보니 아무래도 타투라는 문화 자체가 조악하고 좀 생경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성형외과 의사가 타투 시술을 시작했으니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또 잠깐 외도하다 말겠지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저는 이 일을 30년 가까이 해오고 있어요. 제 삶이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세상에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분들이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의사로서, 62세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할 수 있는 경험은 정말 풍부하게 했고, 그것이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는 조명신 원장. 마지막으로 할 수만 있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일반내과 레지던트가 되는 것이다. 수련을 마치고 아프리카로 외방 선교를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유를 꿈꾸지만 결국 그의 최종 선택지는 의사의 길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래서 조명신 원장은 천생 의사다.